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키타 흐루쇼프/생애 (문단 편집) ==== 반흐루쇼프 음모 및 실각 ==== 흐루쇼프는 쿠바위기 때 너무 막 나간 탓에 권력 기반이 악화되었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당내 고위직들은 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브레즈네프는 사실 흐루쇼프가 출세시켜준 사람으로 우크라이나 지역당의 [[드니프로|드네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인사였는데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국가원수격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앉힌 것이었다.[*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상임위원회:입법부) , "소련 장관회의"(장관회의:행정부), "소련공산당 정치국"(당)은 자주 혼동되는데 (특히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도 모두 presidium(Президиум)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그렇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각각 국회 의장단, 국무회의, 집권여당의 최고위원 회의 정도로 보면 된다. 당시 흐루쇼프는 정부와 당의 수장을 맡고 있었고, 브레즈네프는 입법부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당이 정부를 지배하는 사회주의국가 사정 상, 당 정치국이 사실상의 최고권력기구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을 장악해서 흐루쇼프를 축출한 것이다.] 흐루쇼프는 자신과 지연으로 이어져 있는 우크라이나 사단을 대거 중앙으로 발탁했으며, 이들 신진 우크라이나 인맥이 자신의 집권을 옹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흐루쇼프의 말년 리더십은 지나치게 막나가는 것이었고, 고위급 간부들을 상대로 구박, 질타, 모욕을 마구 서슴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막말은 자신이 승진시켜준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는데, 그는 브레즈네프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서 해임할 것을 결의하면서 브레즈네프에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불필요할 정도로 조롱했으며 자신에게 공손한 브레즈네프의 태도도 얕잡아보고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흐루쇼프는 당내 지도부의 임기 제한을 도입하여 당중앙위원회의 세대교체를 제도화할 것을 제안했고, 간부회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마구 비난을 퍼부으면서 이들을 몰아내고 젊고 유능한 새 간부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6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지도부를 새로 선거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렇게 되니 흐루쇼프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말거나 흐루쇼프의 손에 숙청당할 판이니 그의 막나가는 행태에 질려버린 소련 지도부는 앙금과 차이점을 털어버리고 흐루쇼프 축출 음모로 대동단결하게 된다. 흐루쇼프는 1964년 내내 건강이 안좋았는지 모스크바를 비우고 [[흑해]] 연안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이렇기 때문에 브레즈네프는 쉽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다. 여기에 흐루쇼프의 최측근으로 그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서기국의 소련군, 군수공업, KGB 담당 서기인 코즐로프가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음모자들에게 아주 큰 호재로 작용했다. 일각에서는 코즐로프를 흐루쇼프의 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밝혀진 자료를 보면 코즐로프는 흐루쇼프가 가장 총애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KGB를 관리하면서 주요 간부들을 해임시킬 수 있는 약점들을 죄다 잡고 있었기 때문에 흐루쇼프에 불만이 많았던 간부회원들도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가 죽음으로 음모자들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흐루쇼프의 모험주의는 소련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공포를 자극하여 당내 고위직들은 대부분 흐루쇼프의 축출에 동조했다. 특히 권력기관인 KGB 의장인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와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까지도 흐루쇼프가 직접 임명한 심복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이런 음모에 가담했다.[* 말리놉스키와 세미차스트니는 이런 음모에 가담했지만, 흐루쇼프측에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데는 극히 반대했다. 브레즈네프의 음모가 유혈 쿠데타가 아니라 조용한 형태의 실각이 된 것은 바로 무력을 쥔 이들이 가담해서 역설적으로 폭력사용을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음모는 1964년 9월, 니콜라이 이그나토프의 경호실장을 통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에게 유출되었다. 해당 경호실장은 흐루쇼프가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사이 세르게이에게 당의 거물들이 모스크바 바깥에서 비밀 회동을 벌이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흐루쇼프의 딸 라다에게도 익명의 여성이 전화하여 흐루쇼프를 축출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라다는 KGB에게 신고하라고 했지만 그 여성은 '''KGB 의장도 한패인데''' 어떻게 KGB에 신고하냐고 거절했다. 하지만 세미차스트니는 라다의 남편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며 당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세이 아주베이의 친구였기 때문에 라다는 이를 무시하였다. 아주베이에게도 조지아 서기장인 바실리 므자바나제를 통해서 경고가 전해졌으나 아주베이 역시 이를 무시했다. 흐루쇼프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오고 1주일이 지난 후, 세르게이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흐루쇼프 가족 산책에서 절대 정치 얘기를 해선 안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깨고 자신이 들은 얘기를 전하였다. 흐루쇼프는 잠시 침묵하더니 잘 얘기해주었다면서 누가 음모에 참여했는지를 물었다. 세르게이가 브레즈네프, 포드고로니, 셸레핀 등이라고 하자 흐루쇼프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에 맞서서 동맹을 맺냐고 하였고 완전한 헛소리로 일축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포드고로니를 불러서 그 얘기를 해주었고, 포드고로니는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죠?"라고 태연자약하게 반문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가 들었단 소식에 공포에 질렸다. 카자흐스탄까지 따라가서 바람에 날린 흐루쇼프의 모자를 주워 모래를 털고 다시 씌워주는 아부까지 했던 그는 휴가를 떠난 세미차스트니를 불러 빨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고 수선을 떨었고 자신을 방문한 모스크바 당서기 니콜라이 예고리체프에게 "콜랴, 흐루쇼프가 다 알아. 우릴 다 총살할거야."라고 공포에 떨면서 훌쩍였다. 예고리체프가 브레즈네프를 달래려 하자 브레즈네프는 "당신은 흐루쇼프를 몰라, 모른다고."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그의 가족들이 '비이성적, 비논리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물론 흐루쇼프도 어느 정도는 불안하였는지 정치국원인 드미트리 폴랸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 자백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이런 애매한 태도는 오히려 반 흐루쇼프 그룹을 더욱 서두르게 만들었다. 반 흐루쇼프 그룹은 처음에는 흐루쇼프가 외국 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순간 체포하여 사임을 강요, 실각시키려 했으나[* 이런 수법은 흐루쇼프가 군부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졌던 전임 국방장관이었던 [[주코프]]를 1957년 실각시킬 때 썼던 방법이었다.] KGB 의장이었던 세미차스트니가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하여 포기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흑해 연안에서 장기간 요양중이었는데, "농업발전 협의"로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정치국 회의에 급히 출두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흐루쇼프는 휴가 중인 자신을 빼놓고 정치국 회의가 열렸단 소식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 >흐루쇼프(이하 흐): 대체 무슨 일 때문에 회의를 연 것이오? >브레즈네프(이하 브): 농업과 기타 문제 때문입니다. >흐: 아니, 날 빼놓고 결정을 내린다는거요? >브: 물론 동지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없지요. 이미 정치국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우리는 동지께서 오시길 부탁드립니다. >흐: 나는 지금 휴가 중이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하단 말이오? 난 2주만 있으면 돌아가오. 그때 얘기합시다! >브: 그래도 오셔야 합니다. >흐: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정치국원들이 다 모였다는 게 무슨 소리요? 우린 농업문제를 11월 전원회의에서 다루기로 했지 않소? 그때가 되면 그 모든걸 얘기할 시간이 아주 차고 넘칠건데! 브레즈네프의 계속된 설득에 흐루쇼프는 결국 비행기편이 있다는 조건 하에 다음날에 모스크바로 가는 데 동의했다. 흐루쇼프는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였다. >아나스타스, 당신도 알겠지만 저들은 아무런 긴급한 농업 문제가 없소. 내 생각에는 저들이 나를 부르는 것은 세르게이가 우리에게 얘기해준 그것 때문인 것 같군. 브레즈네프와 반 흐루쇼프 그룹은 자신들이 흐루쇼프를 몰아내야 한다고 여기게 만든 흐루쇼프의 돌발적 행동이 자신들을 향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 만약 흐루쇼프가 모스크바로 가지 않고 모스크바 바깥에서 반격한다면? 10월 12일, 브레즈네프는 세미차스트니에게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었고 세미차스트니는 흐루쇼프의 비행기가 준비되었다고 확인해주면서도 스스로도 불안해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무장관 가스통 팔레브스키와의 오찬에서 흐루쇼프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였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하였고 언제나 사람들을 불러 수다를 떠는 것을 즐기는 평상시와 달리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수행원들에게 조용히 혼자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아르메니아 꼬냑을 서빙하려던 스튜어디스조차 돌려보냈다. 10월 13일, 흐루쇼프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대개 소련 최고 지도자를 위해서 수많은 각료들이 몰려나와 환영을 해주었고, 흐루쇼프는 언제나 그 순간을 즐기면서도 내가 길도 모를 줄 아느냐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날 모스크바 공항은 텅 비어 있었으며 세미스차스트니를 비롯한 세 사람만이 흐루쇼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국 회의에 도착한 흐루쇼프는 언제나처럼 의장석에 앉았고, 회의 소집 이유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개혁은 농업과 공업 모두에 있어 레닌의 가르침을 위배했으며 흐루쇼프가 동지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점심을 먹으면서 마구 결정을 내리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한다고 공격함으로 포문을 열었다. 브레즈네프는 "동지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공산권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상당히 도발적인 표현이다. 북한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을때 몽골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불편한 심정을 표현했다. 참고로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서 서방에서는 대체적으로 환영하면서 북한과 수교를 모색하여 스칸디나비아 4국 및 호주와 친서방 3세계 국가였던 이란, 태국 등이 북한과 수교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나, 공산권에서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해야한다는 대목에 대해서 소위 '친일친미 주구 파쑈 군사독재' 박정희 도당이 자기네 사회주의 형제국보다 더 가까운 것이냐면서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흐루쇼프는 자신은 당과 인민을 위해 오랫동안 봉사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조차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에 휴가도 팽개치고 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몇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은 인정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친구로 여긴다고 했다. 그러자 겐나디 보로노프가 "이곳에 당신의 친구는 없습니다."가 소리를 쳤고 흐루쇼프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거요? 대체 왜?"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의 발언은 제지당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당서기 표트르 셸레스트는 "우리는 동지를 존경해왔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만 동지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이제 아무도 솔직한 의견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좀 더 정중하게 공격했고 그가 정치국과 의논하지도 않고 전개한 처녀지 개간 운동이 재앙적 결과를 불러일으킨 수치라고 지적하면서 흐루쇼프를 예측불허, 통제불능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그 다음은 보로노프였다. 보로노프는 스탈린 숭배를 흐루쇼프 숭배가 대체했다면서 자신이 농업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의 윽박질과 모욕에 눌려 아무런 의견도 표출할 수 없었다고 공격하면서 흐루쇼프가 은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은 알렉산드르 셀레핀이 나섰다. 그는 레닌이 스탈린에 했던 비판이 그대로 흐루쇼프에게 적용되며, 흐루쇼프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수에즈 전쟁, 2차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키거나 여기에 개입한 것도 셸레핀이 공격하였다. 이어 안드레이 키릴렌코는 흐루쇼프가 자신에게 무려 3년이나 전화하지 않았다면서 그와 논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다른 간부들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공격했다. 레오니트 예프레모프, 미하일 수슬로프, 빅토르 그리신도 가세했고 반 흐루쇼프 그룹은 회의를 저녁에 중지하고 다음날 아침에 재개해도 좋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혹시 흐루쇼프가 반격할지도 모르므로 누구도 흐루쇼프가 거는 전화를 받아선 안된다고 합의를 보았다. 회의장을 나온 흐루쇼프는 8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주변을 따라 걸으면서 세르게이에게 "모든게 네가 말한대로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도청당하고 있음을 예감했음에도 미코얀에게 전화해서 "난 늙고 지쳤소. 저들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둡시다. 내가 가장 중요한걸 해냈소. 그 누가 감히 스탈린에게 그가 더 이상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하거나 은퇴해야 한다고 말하는 상상이라도 한 적이 있소? 그런 말 했다간 우리는 물 한방울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거요. 이젠 모든게 바뀌었군. 공포는 사라졌소. 우리는 평등하게 서로에게 얘기할 수 있소. 그것이 내 공헌이오. 나는 싸우지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당연히 KGB는 이것을 도청했고 반 흐루쇼프 그룹은 마침내 승리를 장담하였다. 다음날 10시에 회의는 재개되었고 드미트리 폴랸스키를 시작으로 맹렬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폴랸스키는 스탈린조차도 흐루쇼프보다는 겸손했다고 공격했고 다음 발언자인 미코얀이 흐루쇼프를 옹호할 것을 우려했는지 흐루쇼프는 미코얀조차도 질척거리고 고집스러운 파리라고 모욕했다고 폭로했다. 다음 발언자인 미코얀은 흐루쇼프의 오류를 비판했으나 수에즈와 베를린 사태, 쿠바 미사일 위기에 있어 흐루쇼프의 대처가 옳았다고 옹호했으며 흐루쇼프가 제1비서에서만 퇴임하고 각료회의 의장으로는 남아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만약 흐루쇼프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면 마오쩌둥만 좋아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셸레핀, 유리 안드로포프, 표트르 데미체프, 알렉세이 코시긴이 일제히 그런 반푼이 조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미코얀을 맹렬히 공격했다. 코시긴, 포드고로니가 흐루쇼프를 비판했고, 브레즈네프가 최종적으로 나서서 흐루쇼프가 자발적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어 표결이 있었고 정치국은 만장일치로 흐루쇼프의 퇴출에 동의했다. 최후로 흐루쇼프는 발언권을 얻었다. 참담한 분위기의 흐루쇼프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들은 나의 부정적인 면모와 행동에 대해서 많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해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정치국이 보여준 성숙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해온 일이 조금은 이 성숙함이 창조되는데 도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무례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설명한 많은 것들에 대해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는 제가 약점을 드러냈으며 이것을 습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의 높은 직위가 저의 머리를 헤집어놓았습니다."라고 하였고 각료회의 의장과 제1서기를 겸직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하지만 자신은 무려 46년이나 당원으로 있었으며 자신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진 말고 일종의 명예직이라도 주어 당을 위해 봉사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떠나라면 언제든지 떠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로 이어 브레즈네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였다. 브레즈네프와 수슬로프가 흐루쇼프의 은퇴에 대해서 발표하자 회의장은 "흐루쇼프놈을 당에서 제명하라!", "흐루쇼프놈을 재판정에 회부하라!"라는 야유와 저주가 쏟아졌다. 흐루쇼프는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묵묵히 들었고 이따금 머리를 싸매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브레즈네프를 제1서기로, 코시긴을 각료회의 의장으로 선출하고 종료되었다. 흐루쇼프를 소련 최고회의 부의장으로 남기는 것이 어떻냐는 제의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부결되었다. 그에게는 매달 500루블의 연금과 승용차, 그리고 경호가 제공되기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데타는 성공으로 끝났다. 이런 사실상의 쿠데타가 자진사임 형식으로 끝난 것은 당지도부가 모양새를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소련은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을 이어받음으로써 충동적 리더쉽은 사라진다.[* 참고로 냉전시절에는 소련을 악마화하기 위해서 브레즈네프가 스탈린시절로 돌아간 수구적인 지도자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지만, 최근 정치학계의 연구로는 브레즈네프 시기가 그다지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이 당시 미소마찰에 의한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소련 내부에서는 스탈린 시절과 같은 공포정치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오히려 1970년대 고유가에 의한 오일머니로 소련인민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 이런 체제를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 체제"라고 정치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흐루쇼프 본인도 어느 정도 낌새는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낌새를 눈치챘음에도 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순순히 물러났고, 그 과정에서 연금, 여생을 보낼 주거에 대한 부분을 협의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연금액을 500루블에서 400루블로 깎은 것 외에 다른 조건은 다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소련 1루블은 0.8달러의 가치가 있었고, 64년 당시 미국의 평균 월급이 300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것과 소련의 생필품 가격은 엄청나게 쌌던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돈이다.] 여기에 모스크바의 안락한 주거지, 별장, 자동차 및 기사 제공의 조건이 추가되었다. 브레즈네프 및 반흐루쇼프파 자신들도 살벌한 스탈린 시기를 겪어본 인물들인지라,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를 다시 실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흐루쇼프가 정적들을 죽이지 않고 좌천이나 고액의 연금을 받는 야인으로만 지내게 하여 모양새 좋게 은퇴시킨 것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흐루쇼프가 이렇게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 가능한데, 일단 그 자신의 건강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는 점, [[적백내전]]과 스탈린 통치를 겪었던 그가 또 다른 분열을 일으킬 자신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흐루쇼프의 건강 문제는 의외로 심각해서, 1940년대도 중반에도 한창 전후복구로 바쁠 때에도 폐가 안 좋아서 우크라이나 지역당 서기장을 사임하고 장기간 요양을 했을 정도이다. 아마도 20-30대 내내 돈바스의 [[석탄]] [[막장]]에서 [[광부]]생활을 한 것 때문에 폐가 많이 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흐루쇼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CIA가 몰래 그가 사용한 화장실에서 남긴 걸로 채변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 사람 아직까지도 살아있는게 신기하네." 수준이었다고 한다. 음모자들이 쉽게 음모를 꾸밀 수 있었던 것도 흐루쇼프가 요양을 이유로 장기간 모스크바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흐루쇼프의 후계자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크다. 본래 1960년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였던 알렉세이 키리첸코는 무능해서 해임되었고, 그 다음 제2서기이자 흐루쇼프가 일찍이 후계자로 점찍었던 프롤 코즐로프는 과음과 만성질환으로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흐루쇼프보다 빨리 1965년 사망한다. 결국 흐루쇼프는 브레즈네프, 포드고르니, 코시긴 등을 신임했는데 이 세 사람은 보수파와 손잡고 브레즈네프 정권의 핵심구성원들이 된다. 결국 정적을 키워준 셈이다. 유일하게 흐루쇼프의 강력한 아군이었던 사람은 [[미그]]사의 창립자인 아르툠 미코얀의 형인 아나스타스 미코얀으로 흐루쇼프 해임당시 최고 소비에트 상무회 주석으로 국가원수였는데, 이 사람도 결국 흐루쇼프를 비호한 여파로 실각하고 만다.[* 흐루쇼프 실각 후에도 미코얀, [[미하일 수슬로프|수슬로프]], [[안드레이 그로미코|그로미코]] 등은 개혁파의 입장에 서서 당내 민주주의, 권력 분점, [[집단지도체제]]등을 줄기차게 주장하였으나 이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유리 안드로포프|안드로포프]]는 당시 소련 권력층에서 그렇게 급진적인 개혁파는 아니었다. 수슬로프의 경우 '흐루쇼프가 1인 독재를 하려고 해서' 흐루쇼프의 실각에 참가한 것이지 원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안드레이 즈다노프|즈다노프 노선]]을 따라 권력분립과 당내민주주의에 '집착'한 일종의 보수개혁파였으며, 미코얀의 경우 노동계급에 정치적 실권을 부여하자는 주장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